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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지옥 도꾜대공습을 체험한 송정호씨의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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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전의 오늘(3월 10일) 미공군이 감행한 도꾜대공습으로 일본사람들과 함께 조선사람을 비롯한 외국사람들도 수많이 희생되였다. 도꾜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은 작년 2월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조대위)로부터 송정호씨라고 하는 도꾜대공습의 체험자가 공화국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 생전의 송정호씨 |
이에 따라 그해 10월에 조선을 방문하여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청취할 예정이였으나 송정호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도꾜진상조사단에서는 조대위에 보관되여있었던 그의 생전의 증언을 입수하였다. 이하 송정호씨의 증언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나는 2008년 5월 25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일본 도꾜에 끌려가 미군의 공습에 의하여 희생된 조선인강제련행희생자문제와 관련한 조사보고서》를 읽고 내가 실제로 체험한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해당기관에 알려줄 생각을 하였다.
나는 1943년 10월 일본 도꾜도 죠또구(당시)에 있는 特殊鋼주식회사에 끝려가 1945년 5월까지 있었다.
1945년 3월 10일 밤 12시에 미군의 대형폭격기《B-29》에 의해 소이탄과 폭탄이 투하된 당시를 직접 체험하였다.
속아넘어 일본에
우리 아버지 송계삼은 지주집땅을 부쳐먹으며 소작살이를 하였는데 대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하다가 내가 9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형제는 8남매인데 누이 4명과 형 3명이 있었고 내가 막내였다. 부모를 닮아서 체격들이 컸다.
형과 누이들은 오래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도 어느덧 80고령에 이르렀다.
우리 집안에서 막내인 나만은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보자고 마음먹고 모든 힘을 다하여 내가 학교에 남부럽지 않게 다니도록 해준 덕분에 나는 어려운 가정환경속에서도 그리 불편함을 모르고 《국민학교》를 졸업할수 있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어머니와 형님, 누나들이 바라는대로 꼭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할수 있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그해에 면에서 국민학교 졸업생들중에서 학업성적이 좋고 체격도 튼튼한 학생을 2명 뽑았는데 바로 내가 뽑혔다. 면에서는 《양성생》이라고 하면서 일본에 보내여 기술도 배우고 공부도 하여 돈도 많이 벌어올수 있다고 하였다.
부모형제들과 헤여져 낯설고 물설은 남의 나라에 가는것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울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우기는 학교적으로 《뽑혀서》 간다는 《우월감》으로 해서 은근히 호기심도 났다.
강계군에 가니 나처럼 《뽑혀온》 사람들이 40여명이 되였는데 모두가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다. 실제로 그들의 평균녕령은 19~20살이였다. 나는 14살이였는데 키가 크다고 하면서 2살 불구어도 될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생각없이 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름도 일본식이름으로 《모리또꾸 마사히로(森徳正浩)》라고 하였으며 같은 학교에서 함께 간 동무의 이름은 《다마가와 도꾸수이(玉川徳水)》라고 불렀다. 그의 조선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를 인솔해간것은 면서기와 재향군인외에 또 1명이 있었는데 후에야 그가 일본에서부터 우리를 데려가자고 온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강계군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부산의 어느 한 속소에서 인원점검을 할 때 내가 제때에 대답을 못하자 우리를 인솔해오던 자는 《이 자식! 제이름도 모르는가!》고 궁둥이를 걷어차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부산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인솔자놈이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일체 자유행동은 없다. 부산까지는 너희들이 집으로 가겠다고 할가봐 어루만졌지만 이제부터는 어림없다!》고 으름장을 놓는것이였다.
부산에서 関釜連絡船을 타고 8시간만에 시모노세끼에 도착하였다. 시모노세끼에 도착한 후 인차 우리가 입고 간 옷들을 모두 벗기고 단체작업복으로 갈아입혔다.
제강소에서의 중로동
10월 10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48시간동안 달려 10월 12일에 도꾜에 도착하여 《미야기》앞에 가서 일을 잘하겠다는 서약식을 하고 목적지라고 하는 죠또구의 《도꾜特殊鋼管주식회사스나마찌제강소》에 도착하였다.
제강소의 기본임무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철강재를 생산하는것이였다.
제강소에는 5t전기로가 3기, 7t반짜리가 1기 모두 4기 있었고 2일에 3번씩 출강하였다. 생산된 철강재는 기차로 실어갔고 오물과 광재페기물 등은 제강소옆에 흐르는 운하를 통해 기관선에 실어 먼 바다로 내갔다.
종업원은 3,000여명이고 그중에서 조선사람이 약 500명가량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온 남반부지역출신사람들과 평안남북도에서 온 북반부지역사람들이였다. 지방별특성과 개별적으로 성격들이 각이하다나니 어떤 때는 서로 티각태각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친하게 지냈다. 조선청년들은 하루 12~14시간, 어떤 날에는 16시간, 지어 18시간동안 밤낮으로 내몰릴 때가 많았다. 왜놈들은 우리 조선사람들에게 그 무슨 기술을 배워준것이 아니라 오물과 광재를 실어내는 단순하면서도 힘에 부치는 작업만 시켰다. 작업장에서는 늘 감독의 감시하에 일하였으며 조금만 일손을 늦추어도 무자비한 욕설과 매질이 가해졌다. 고향에서 떠날 때의 말과는 달리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사람들은 2년동안 오물과 광재를 싣고 부리는 작업만 하였다.
숙소는 2층짜리 목조건물이였다. 기숙사에는 한방에 10명씩 배치되고 하루작업이 끝나서 숙소에 돌아오면 《神棚》앞에 꿇어앉아 《오늘 작업량은 얼마나 했는가, 과제를 다 했는가, 출퇴근시간을 정확히 지켰는가.》 등 자기반성을 하게 되여있었다. 반성을 잘 하지 않으면 저녁밥을 주지 않았다.
밥은 납작보리밥이나 두부비지밥(おから飯), 대용식품인 도꼬로뗑을 120~150g정도 주었는데 배가 고파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또다시 벌로 《神棚》앞에 꿇어앉히고 반성을 시켰으며 심한 경우에는 매질까지 하기때문에 무조건 복종할수밖에 없었다.
3월 10일의 대공습
1945년 3월 10일 미군비행기 수백대(당시 신문은 325대라고 하였다)가 도꾜 중심구역을 맹폭격하였다. 도꾜와 그 주변에 고사포들이 미군폭격기에 대고 올려쏘기는 하였지만 잘 맞지 않았다.
주로 소이탄과 폭탄을 퍼부었는데 목조건물이 많은것을 타산한것 같았다. 게다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더욱 세게 번졌는데 그 불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타죽었다. 그전에 왜놈들은 《〈B-29〉는 〈사이판(괌도)〉에서부터 2시간동안 날아와 2시간 폭격하고 2시간동안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그 시간에 防空壕에만 들어가있으면 살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모든것을 태워버리는 불길과 숨막히는 연기속에서 防空壕도 별로 맥을 추지 못하였다.
이날에 있은 야간폭격과 소이탄에 의한 화염으로 작업교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던 조선사람들은 거의다 불타죽거나 질식되여 죽었으며 공장에서 작업하던 사람들도 폭격속에 불타죽었다. 주변에 살던 일본인로동자들과 그 가족들도 많이 죽었다.
그날 나는 늘 함께 지낸 가까운 동무인 리기원(일본이름《기무라 나가오》, 19살)과 야간교대번이여서 제강소에 나와 여느때와 같이 슬라크(スラグ)를 운반선에 싣는 작업을 하고있었는데 防空壕로 갈 사이가 없어서 운하에 뛰여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물밖에 머리를 내밀고 둘러보니 공장과 그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 그 불바다속에서 처참한 비명소리와 무엇인지 쾅쾅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이였지만 화염으로 하여 대낮같이 환했다. 우리처럼 운하에 뛰여든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남을수 있었다. 그날의 폭격속에서 제강소 로동자들중 살아난 사람은 약 1,000명정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리기원과 나만이지, 같이 간 40명은 온데간데 없었다. 모두 불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부터 피해복구를 한다고 하였지만 복구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빵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제강소복구작업에 내몰렸다.
결코 잊지 못할 만행
나는 리기원과 함께 제강소에서 빠져나와 지바현에 갔다. 그때 전라도출신의 60대의 조선사람밑에서 밥만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된다는 조건으로 일하였다. 어느 비행장 건설장에서 토목공사를 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8.15를 맞이하였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홍량이라고 기억된다. 기업주까지 셋이서 해방후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0월중순에 시모노세끼에 갔는데 큰배가 조선으로 가는것은 없었다. 10일동안 수소문하여 겨우 50명정도 탈수 있는 소형기관선(밀선)을 타고 3일만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관부련락선을 타고 일본에 갈 때는 8시간 걸렸는데 이 소형기관선은 70시간이나 달려서 밤 9시경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조국동포들이 우리를 얼싸안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라고 진심으로 반가와하였다. 아마도 자기 자식과 남편을 기다리는 혈육의 심정이리라. 그들의 따뜻한 환영과 환대를 받고 다음날 기차로 개성에 가서 걸어서 38선을 넘어서 금천에 갔으며 만포행기차를 타고 고향인 립관에 도착하였다.
내 나이 80에 이르고있지만 왜놈들과 결판을 내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수도 없다. 아직 부모들의 품속에서 어리광이나 부리고 한창 배워야 할 뼈도 굳지 않은 소년들을 《기술전습》이요, 《양성》이요, 돈벌이요 하면서 구슬려 혈육들의 품속에서 떼여내여 값눅은 로동력으로 끌어가 노예처럼 혹사하였으며 갖은 민족적멸시와 학대를 강요한 일제의 짐승같은 만행을 천추만대를 두고서도 잊을수 없다.
뿐만아니라 패망후 60여년이 흐르는 오늘까지도 조선사람들의 희생과 피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회피하고있는 일본당국과 일본기업들의 파렴치한 처사를 강력히 단죄규탄한다.
우리 전체 강제련행피해자들은 일본의 력사적인 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대를 이어서라도 이 원한과 피의 대가를 기어이 결산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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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일만 도꾜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 조선인측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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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8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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