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생활
 
〈2009년 동포사회를 돌이켜보며〉 가장 인상에 남은 말
 
  조미관계의 진전과 경제부문의 앙양 등 조선을 둘러싼 전반 흐흠이 호전되기 시작한 2009년. 반면에 재일동포사회를 둘러싼 정세와 환경은 여전히 엄혹한 해이기도 하였으나 동포들은 단결하여 지역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분발함으로써 애족애국운동에서 새로운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취재과정에 가장 인상에 깊이 남은 말들을 소개하면서 올해를 돌이켜보았다.

《지역동포사회는 우리가 지킨다》

지역동포사회의 활성화를 위하여 공연을 펼친 니시노미야지부 조청원들
  올해 지부와 분회의 행사에 참가하면서 거의 모든 곳에서 동포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부와 분회, 학교 등 1세들이 일떠세우고 지켜온 지역동포사회를 지키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동포들의 마음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더욱 굳세여지고있는것처럼 보인다.

  2002년이후 일본사회를 휩쓴 《반공화국, 반총련》의 사회적풍조는 재일동포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있다. 그것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도리여 로골화되여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언, 폭행사건에로 이어졌다.

  《지역동포사회는 우리가 지킨다.》 하는 말은 이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속에서도 선대에 대한 의리와 후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자고 일떠선 동포들의 마음이 깃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조청효고 니시노미야지부 조청원들은 한신조선초급학교 졸업생으로서 지역의 동포사회를 지난 시기처럼 활기찬것으로 하자고 공연을 조직하였다. 그들의 각오다짐은 동포들속에 깊이 침투되여 《조청이 이렇게 분발하고있을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격려하는 동포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청원들도 공연준비과정에 자기들이 동포사회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자각이 더욱 굳어졌다고 지부위원장은 말하고있었다.

  총련오사까 히가시오사까남지부에서는 약 10년만에 분회대항소프트뽈대회를 개최하였다.

  지부에서는 분회활성화의 계기점으로 삼자고 준비사업을 깐지게 벌렸다. 분회들에서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오래간만에 열리는 소프트뽈대회를 지향하여 분회동포들에 대한 동원사업과 함께 훈련에도 여념이 없었다.

  어느 분회에서는 12월의 분회총회를 성황리에 치르기 위해 우선 소프트뽈로 기세를 올리자고 주 1번의 련습을 빠짐없이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 《유니폼을 새로 만들자.》, 《래년에는 련맹전에 참가하자.》 등의 적극적인 의견도 나왔으며 대회에서는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팀감독은 《분회를 활성화하자고 시작한 소프트뽈이였는데 어느새 소프트뽈에만 몰두하고있었다.》 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분회동포들을 자주 만나게 되고 부인들끼리 교류도 깊어지는 등 확실히 분회활성화의 계기가 되였다고 말하였다.

  히로시마에서 24년만에 진행된 학생공연에는 학교까지도 포함한 지역동포사회를 지키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동포들의 뜨거운 마음이 어리여있다.

  민족배타적인 사회풍조속에서 가장 마음의 고통을 겪은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있다는것을 전해주자고 청상회 성원들을 비롯한 새 세대 동포들이 학교 교원들과 힘을 합쳐 준비사업을 진행해왔다. 한명이라도 많은 일본사람들이 관람하고 민족교육의 우월성과 정당성에 대한 리해를 깊이는 계기로 하자고 적극적으로 동원사업을 벌렸다.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회장을 찾은 일본시민들은 학생, 원아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총련은 올해 기층조직의 강화 등을 목표로 한 《100일운동》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각지 총련지부들에서는 분회의 재건과 활성화 등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총련조직의 강화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동포들이 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기 위한것이며 운동은 동포들자신이 주인공이 되여야 진정한 운동으로 된다.

  재일동포들을 둘러싼 정세는 래년도 엄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결하여 역경을 맞받아 투쟁으로 권리를 쟁취하여온 1세들처럼 동포들이 일심단결하면 그 어떤 난관도 뚫고나갈수 있다는것을 실감한 1년이였다.(리송학기자)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면 리해된다》

각지에서 조일친선을 위한 모임이 진행되였다.(사진은 뮤지컬 《명성황후》, 구마모또)
  얼어붙은 조일관계를 어떻게 하나 진전시켜보자는 동포들과 일본시민들의 꾸준한 활동은 여러 지역, 여러 분야에서 열매를 맺어나가고있다. 만남과 대화를 서로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직하고 조일우호친선을 촉진시켜나가는 일본사람들한테서 배울것이 많았다.

  올해 우리는 귀국실현 50돐을 맞이하였다. 당시 공화국에 귀국하는 재일동포들을 태운 첫 귀국선은 니이가다항에서 출항하였다. 부두에서는 귀국실현을 위한 투쟁에 련대하는 일본시민들도 수많이 나와 귀국자들을 손저어 바랬다. 그런데 지금 《인도의 배》는 거기에 입항 못하게 되여있다.

  니이가다는 조일우호친선을 상징하는 도시인 동시에 오늘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로골적으로 조선인탄압이 감행된 도시이다. 2002년 9월 17일이후 이곳에서는 총련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우익보수세력들에 의한 탄압과 협박사건이 련이어 일어났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리한 조건속에서도 부당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우호친선의 전통을 이어가고있는 일본의 벗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해마다 니이가다조선초중급학교에서 진행되는 조일문화교류행사인 《미래페스티벌》. 12번째가 된 올해도 1,000명을 넘는 동포, 일본시민들의 참가밑에 성대히 진행되였다.

  《미래페스티벌》을 조직하는데 힘써온 有田純也씨는 《준비과정에는 행사취지도 모르는채 그저 동원되여왔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참가하면 거기서의 교류를 통해 조선인이나 조선학교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는 법이다.》고 말하였다.

  축구를 통하여 재일조선인들과 만난 그는 《9.17》직후도 조선청년들과 만나 술도 마시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신뢰관계를 구축해나갔다.

  구마모또의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회》 甲斐利雄씨는 1895년 10월 8일에 감행된 명성황후학살에 관여한 사람들 48명중 21명이 구마모또현출신이였다는 사실에 가슴아파하고 사건의 진상조사활동을 하고있다.

  그는 교원을 하던 수십년전에 만난 어느 조선소녀한테서 《세계의 모든것은 한사람의 한발자국으로부터 시작된다.》는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것》을 자신의 신조로 하고 조선과 일본의 력사문제에 기초하여 조일우호친선에 이바지하고있다. 《만남을 만드는것이 나의 보람이다.》고 그는 말하였다.

  한편 올해 《재일조선인력사인권주간》은 강제련행문제를 가지고 진행되였다. 특히는 강제련행문제가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는 인권문제라는것이 지적되고 랍치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저들의 과거죄행을 덮어보려는 일본의 이중기준성이 폭로되였다.

  그 마당에서 효고 다까라즈까시민들에 의한 극단 《水曜日》는 조선인탄압을 선동하는 메디어의 편향보도와 과거청산을 하지 않고 재일조선인들을 탄압하는 일본정부의 차별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어느 일본인사는 《일본사람들과 조선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권문제를 생각하고 의견교환하는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올해도 여러 지역에서 조일우호친선을 깊이기 위한 교류, 민족교육에 대한 리해를 도모하기 위한 공개수업과 바자, 조일사이의 과거력사를 공유하기 위한 심포쥼 등 여러 행사와 활동이 있었으며 지방의원들, 시민단체 대표들을 비롯한 여러 일본인사들이 조선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꾸준한 대화와 교류가 더 많은 수확을 가져올것이다.

  오사까의 어느 동포녀성은 《우익세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조일교류활동을 벌리는 일본사람들의 용감한 소행에서 얻을것이 많다. 조금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을 멀리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활동에서 힘을 얻었다.》고 말하였다.(리태호기자)

《민족의 한 성원이라는것을 재확인》

《무지개회》의 전국교류모임이 교또에서 진행되였다.
  가식없는 소박한 한만디가 생활의 진리를 반영하거나 동포사회의 현장을 알려줄 때가 있다. 그 한마디를 모든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있지 않을가 하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다.

  《우리 아이도 민족의 한 성원이라는것을 재확인했다.》

  《무지개회》의 전국교류모임(8월 22~24일, 교또, 본지 8월 31일호 1, 2면, 9월 2일호 7, 8면에 게재)에서 어느 아버지가 한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동포사회에서 기쁨도 슬픔도 나누고싶다.》고 눈시울을 적시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참으로 소박하고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장애가 있는 아이의 부모로서 남들이 모르는 형언할수 없는 고뇌가 있었고 그들에게 용기를 안겨준 뜨거운 동포애가 있었다.

  교류모임의 2일째 저녁 청상회가 준비한 식사모임이 끝나자 그 자리는 참가자들이 하고싶은 말을 하는 마당으로 되였다.

  부모들은 《지난 시기는 래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교또의 일군, 활동가, 각지에서 모여온 자원봉사원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전하였다. 부모들은 첫날째 밤에도 고뇌를 공유하면서 취학, 취직 등 래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있었다. 지난 시기에는 이렇게 못해왔다. 고민을 함께 하고 의논할 사람과 그러한 마당이 없었기때문이다.

  교또의 각급 기관과 단체, 이곳 동포들은 이번 교류모임을 동포복지활동에 대한 인식을 깊이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 동포애의 심정으로 모든 성의를 다하여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일본방방곡곡에서 120명을 넘는 자원봉사원들이 달려왔다. 보수를 바라지 않는 동포들이 여기에 모였다.

  적지 않은 시간을 거쳐 구축된 부모들의 신뢰관계와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자는 동포애가 교류모임에서 결합되였다.

  실무사업을 담당한 어느 일군은 참가자들에게 《교류모임을 통해 우리 동포사회의 잠재력과 량심이 발굴되였으며 오히려 우리가 빛나게 되였다. 이 사업을 맡아할수 있은것을 영광으로 느낀다.》고 말하였다.

  《장애자들에게 빛을 주는 사회》가 아니라 《장애자들이 빛나는 사회》의 건설은 흔히 말하는 《정상화(normalization)》의 중요한 정신이다. 그 토대가 우리 동포사회에 있다는것, 홀로 사는것이 아니다고 재확인되였다. 그래서 《우리 아이도 민족의 한 성원》이라는 말이 나왔을것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문제해결의 토대라고 확신한다.

  필자도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동포사회에서 기쁨도 슬픔도 나누고싶다. 그때 車椅子를 탄 동포를 선두로 누비는 《통일렬차》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뜨겁게 고여드는 눈물을 사진기로 감추었다.(정상구기자)

《길은 열렸다》

조선팀의 월드컵출전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명확한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게 되였다.(사진은 올해 꼬마축구대회, 효고)
  《조선팀, 44년만에 월드컵출전》의 표제가 6월 22일부 《조선신보》 1면머리기사로 게재되였다.

  조선남자축구대표팀이 6월 17일 국제축구련맹(FIFA) 2010년월드컵 남아프리카대회 아시아지구최종예선 B조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마지막경기를 0-0으로 비겨 끝내 2위를 차지하고 1966년 잉글랜드대회이래 44년만, 2번째의 본경기출전을 결정했던것이다.

  그 력사적순간 선수들속에는 안영학, 정대세라는 우리 학교를 졸업하여 팀의 기둥으로서 활약한 선수 그리고 김광호감독(코치,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 부회장)의 모습이 있었다.

  경기를 중계방송으로 지켜보았다. 화면을 통해 안겨온 팀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대표팀의 월드컵출전을 몸가까이 느낀 순간은 하네다공항에서의 취재였다.

  6월 19일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경기를 끝낸 정대세선수가 일본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을 향하였다.

  공항에서는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 리강홍리사장을 비롯한 관계자가 정대세선수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었다. 수많은 남조선, 일본기자들도 모여들고있었다.

  드디여 정대세선수가 공항로비에 도착하였다. 정대세선수는 무엇보다 먼저 꼬마축구시기부터의 은인이라고 말할수 있는 리강홍리사장과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월드컵출전을 이룩한 당사자의 모습을 통해 그 무게를 실감하였다.

  위풍당당하게 활보하는 정대세선수에게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는 기자들앞에서 월드컵출전까지의 로정에 대해 가슴펴고 말하였다.

  《승리의 요인은 한마디로 강한 정신력에 있었다. 조선대표의 일체감은 세계일등이다. 조선팀의 단결은 다이아몬드처럼 굳어졌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정대세선수는 계속 울었다. 월드컵출전까지의 로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그 눈물이 말해주었다.

  안영학선수와 함께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는 정대세선수는 이때 각지 우리 학교에 다니는 꼬마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길은 열렸다.》

  약 2개월후인 8월 효고에서 진행된 제31차 재일조선초급학교학생중앙축구대회 회장에서는 숱한 꼬마선수들이 《언젠가 나도 조선대표선수가 되여 월드컵에 출전할래요.》 하는 말을 하였다. 이제까지 월드컵은 《꿈》이였다. 그러나 조선팀이 2번째로 출전하게 되여 우리 학교 학생들은 명확한 목표를 새로 내걸게 된것이다.

  정대세선수는 《길은 열렸다.》고 하면서 《앞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의 본보기가 되겠다.》고 말을 이었다. 그것은 월드컵 본경기에 림하는 자신의 굳은 결심의 표현이였다.

  1960년대의 조선대표를 잘 아는 어느 동포는 《월드컵출전 그자체에 의의가 있다. 승패는 관계없다.》고 말한다. 한편 조선대표팀이 래년 6월에 강호팀이 많은 G조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것인가 기대하는 젊은 청년들이 많다.

  월드컵출전의 기쁨과 기대감으로 들끓는 조선스포츠계 그리고 재일동포스포츠계. 전통적인 민족경기인 축구를 크게 발전시키려는 각계각층의 관점과 기대는 재일동포선수들의 활약을 강하게 추동해줄것이다.(리동호기자)
(조선신보 sinbo@korea-np.co.jp)
2009/12/25 13:18:00